오래된 집을 보면 ‘저 집에는 참 많은 역사가 깃들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양마을만 해도 연조가 있어 보이는 멋들어진 기와집 두 채가 있고, 유치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 마을을 다니다 보면 수몰되기 전의 덕산이나 단산 같은 마을에서도 그럴듯한 기와집이 눈에 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치에는 오래된 옛집이 없습니다. 1948년도 여순 사건이 나고 나서 그 주도 세력이 진압된 후 잔여 세력은 주로 지리산권으로 숨어들었는데 일부 세력이 지리산 권역 못지않은 산골인 유치면 일원까지 들어왔다고 합니다. 유치면에서도 산중인 보림사 골짝의 여러 마을이나 한치 같은 곳에서 주로 활동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른들은 그들을 ‘반란군’이라 불렀습니다.
이 반란군들은 이발을 제대로 하지 못해 대부분 머리카락이 길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은 이발을 하지 못해 머리가 덥수룩한 사람을 보면 “반란군처럼 머리가 길다”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그만큼 반란군에 대한 인상이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반란군이 한치 등 유치면의 산간 마을까지 들어오게 되자 군경 측은 산골 마을을 소개(疏開)시키는 작전으로 반란군들의 터전을 없애려 했나 봅니다. 그래서 한치는 1948년도에 1차 소개를 당하여 모든 집들이 다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그 이듬해인 1949년 봄이 되자 전답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마을 주민들이 다시 들어와 움막을 지어놓고 농사를 지었는데 군경은 그해 재차 소개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50년 6·25 동란까지 터지게 되자 마을 주민들은 아예 외지로 피난살이를 나갈 수밖에 없었고 동란이 잠잠해지고서야 다시 마을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 무렵 소개되어 나갔거나 피난을 떠났던 주민들의 상당수가 그대로 외지에 눌러앉게 되어 6·25 동란이 끝난 이후 가구수와 주민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치 주민들은 그 전란 통에도 전란과 직접 관련되어 죽어 나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어른들은 동네 자리가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좋게 해석들을 하였습니다. 지금 한치에 남아 있는 옛집은 세 채가 있는데 옛집이라고 해보아야 모두 6·25 동란 이후 지어진 흙벽집입니다. 원래는 모두 초가집이었는데 1970년대 말경에 양철(함석) 지붕으로 바뀐 것들입니다. 그나마도 이제는 두 집은 비어있고 한 집에서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 중의 한 곳은 내 친척 할아버지 집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가 1990년도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이후에도 그 집은 참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습니다.
어느 해는 조양이 고향이라는 분이 몇 년 그 집에서 거했습니다. 그분은 사주, 관상 이런 거 공부하는 분이었습니다. 나에게도 이런저런 여러 이야기를 해주는 데 이제 구체적인 내용들은 생각나지도 않지만, 그분이 말해준 대로 인생의 행로가 펼쳐져 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때는 한 비구니 스님의 부친이 그 집에서 거했고 어느 해 나도 그 집 부엌방을 공부방 삼아 잠시 지낸 적도 있습니다.
2000년도에 우리 집을 새로 지을 때는 우리 식구들이 이 집의 신세를 톡톡히 졌습니다. 안방은 목수들이 사용하고 작은 방은 우리 식구들이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이후에도 한치로 새로 들어와 살게 된 외지인들 여러 명이 집을 짓는 몇 개월 동안 또 그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였으니 이 집은 집주인이 가고 나서도 20여 년을 다양한 사람들을 품어온 셈입니다. 작은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할아버지 하면 꼭 생각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다 보면 할아버지는 그냥 길을 가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몇 걸음 가다가 길에 굴러떨어진 돌멩이가 있으면 그걸 주워서 길가에 버리셨고 또 몇 걸음 가다가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으면 그걸 주워서 버리셨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이런 것이 실천하는 교육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그런 마음과 자세로 사셨던 분이라서 그런지 그 집은 집주인이 가고 나서 오래도록 쉬이 무너지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오래도록 품어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른’ 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바른 삶을 실천하신 할아버지의 얘기를 읽으며 소녀같이 맑으셨던, 마음이 참 고았던 외할머니가 그리워집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만 생각했었지요.
문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고향이 사람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진 님에게는 외할머니가 고향이고, 문 작가님에게는 풍격(風格)을 갖추셨던 할아버지가 그리운 고향일 수 있겠구나!
아침에 루쉰의 ‘고향’을 읽었는데 그 쓸쓸함과 쓰라림의 느낌이 문 작가님의 글을 읽고나서 되살아 나는군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