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치의 옛 삶을 특징짓는 단어 두어 개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단연 ‘다랑이논’과 ‘지게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좁은 골짝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으니 개울가에 논을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간에는 계단식의 다랑이논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지간한 산의 양지바르고 경사가 완만한 곳은 그 지목 여하에 상관없이 밭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전 한치의 유일한 운반수단은 오로지 남자들의 지게와 여자들의 머리밖에 없었습니다.
마을에 리어카 종류는 없었고 초등학교 3~4학년 무렵부터 동네에 경운기가 등장하였는데 그 경운기는 처음에는 농사용이 아닌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마을 주변의 논부터 합배미(다랑이논 몇 개를 합치는 일)를 하고 경운기의 이동로가 만들어지면서 경운기로 농사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위쪽 골짜기의 다랑이논부터 점점 버려지기 시작한 것은 물론입니다.
쟁기질이 경운기로 대체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다른 부분의 논농사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추수하는 일만 따져보더라도 일단 벼를 벤 다음 뒤집어 말리고 이걸 뭇으로 묶어서 논에다 베늘(낟가리)을 쌓아둡니다. 벼를 말리는 중간에 비라도 내리면 재차, 삼차 뒤집어서 말려야 합니다.
논에 임시로 쌓아두는 베늘은 맨 아래 4뭇, 그 위에 3뭇, 그 위에 2뭇, 마지막 맨 위에 1뭇을 쌓으면서 위로 쌓아 올릴수록 아랫단을 뒤쪽으로 빼놓는데 이렇게 해놓으면 나락목이 있는 쪽이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게 되어 웬만큼 큰 비가 와도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됩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고 하시면서 나락뭇 열 단으로 이루어진 이 베늘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컨대 베늘의 맨 윗단 한 뭇은 ‘태극’을 상징하고, 위에서 두 번째단 두 뭇은 ‘음양’을 상징하고, 위에서 세 번째단 세 뭇은 ‘천지인’을 상징하고, 맨 아래 네 뭇은 ‘춘하추동’ 4계절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이 태극에서 시작된다는 주역의 원리를 간명하게 설명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힘든 농사일 속에도 철학적 사유 방식을 곁들여 공부하는 자세를 갖추려 했던 선인들의 자세가 배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더 오래전에는 홀태를 논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논에서 직접 나락을 훑어서 볏가마니를 지게로 나르는 경우가 있었고 아니면 볏짐을 마당이나 집 근처의 논으로 옮겨 놓았다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훑어 나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통일벼가 유행하였는데 통일벼는 나락목이 쉽게 떨어지므로 나락뭇째로 지게로 나르기가 어려워서 포장과 드럼통이나 절구통을 지고 다니면서 논에서 직접 드럼통 등에 두드리는 방식으로 털어내기도 했습니다.
일반벼의 경우 추수하는 방식이 홀태, 인력 탈곡기, 발동기로 연결된 탈곡기, 전동 탈곡기, 경운기로 연결된 탈곡기 등으로 변천되어 왔고 또 그 여러 가지가 혼재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홀태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서야 드디어 한치에도 콤바인으로 추수하는 초현대식 추수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어떤 과정에서도 한치 남자들에게 지게질은 필수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면 아버지들이 어린이용의 작은 지게를 만들어 주시게 마련입니다. 그걸로 농사일도 돕고 겨울에는 나무를 했습니다. 아이들끼리 겨울방학 동안 누가 장작더미를 더 높게 쌓았나 하는 경쟁이 은근히 붙기도 하였는데 나는 늘 하위권이었습니다.
보통 나락 짐을 기준으로 장정 한 짐이라고 하면 나락 10뭇, 즉 베늘 하나를 모두 져야 하는데 나는 여태 한창 힘이 좋을 시기에도 나락 8뭇을 초과하여 져본 적이 없으니 농사꾼이나 일꾼으로 치면 하급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등산로나 길가에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저거 몇 지게는 되겠다. 지게로 져다 놓으면 소죽 몇 솥은 끓이겠다” 이런 허망한 상상을 하며 지나갑니다. 비록 하급 지게꾼이었지만 오랫동안 지게질했던 기억이 떠오르곤 하는 것을 보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그 시대 어려움을 뒤로 하고
그저 웃음이 지어집니다
홀태, 지게 등의 단어가 나오니 옛 추억이 떠올라 반갑습니다.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어릴 적 보았던 시골풍경이 그려집니다.
타작 마당에서 홀태를 밟던 엄마 모습이 떠오릅니다. 낟알 털린 짚더미 위에 올라가 뒹굴며 놀다가 미끄러져 이마를 다쳤던 기억도 납니다.
햅쌀밥 먹으며 즐거웠던 그 때. 걱정없던 유년이 있었음에 감사하는 저녁입니다.
문 작가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머니가 벼를 털어내기 위해 썼던 도구들이 생각나네요.
드럼통, 나무절구통 등
고향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애틋한 시선을 지니신 작가님이 부럽습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는 이는 가슴 설렘을 간직하고 살아가겠지요.
읽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