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3월 18, 2025
연재한치이야기 3 - 그 겨울의 신우대 밭

한치이야기 3 – 그 겨울의 신우대 밭

한치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토박이 세 집. 그 아짐들 세 분은 참으로 징글징글한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산골 마을의 삶이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피눈물 나는 세월이었겠지만 한치의 삶 또한 결코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토박이 세 집을 포함해서 가장 나중에 한치에서 뜬 집 포함한 네 집은 대개 전답 깨나 있던 집들입니다. 별반 전답도 없던 집들은 차라리 일찍 한치를 등졌지만 전답이 있는 집들은 그러지도 못했던 모양입니다. 산중에서 전답이 좀 있다고 해 보아야 밥이나 굶지 않는 수준이지 경제적으로 특별히 윤택해질 것이 없었을 터입니다.

문제는 자녀들이 커가면서 심각해졌습니다. 지금은 학부모들이 사교육비 때문에 허리가 휜다고 아우성이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사교육이 문제가 아니라 중학교 진학 때부터 경제적으로 큰 문제였습니다. 한치는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벌써 중학교 때부터 면소재지로 나가서 자취를 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주로 배바위, 갈머리, 장터 등지의 적당한 집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자취를 하게 되면 부가적인 비용이 들기 마련입니다. 이러니 부모님들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자식들 학비며 용돈이며 겨우겨우 대주게 되었을 것입니다. 뻔한 수입에 지출이 늘어가니 중학생 이상의 학생 수가 늘어날수록 차츰 빚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남정네들의 고생은 당연한 것으로 치더라도 아짐들의 고생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른 봄이면 산나물을 뜯어서 팝니다. 이게 재미 삼아 하는 것과 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고사리 같은 것은 새벽 일찍 나서면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늦은 오후에서야 들어올 때가 있고 취나물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많이 뜯을 수 있는 종류라서 한두 차례 더 집에 다녀가기도 합니다. 

농사철이면 당연히 농사일 뼈 빠지게 해야 합니다. 내 어렸을 적에는 보리밭까지 다 손으로 매주었으니 밭매고 논까지 매는 지경이었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여름철에는 칡넝쿨을 베어다 판 적도 있습니다. 칡넝쿨의 껍질을 벗겨서 가마니 종류를 만든다고 들었는데 신풍 앞 냇가에 큰 가마솥에 칡넝쿨을 삶아서 껍질을 벗겨내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추석 때가 되면 송편에 들어갈 모싯잎을 뜯어다 팝니다. 한치에서 한 고개 이고 신풍까지 걸어가서 완행버스로 광주나 나주, 영산포 등지의 장에 내다 팝니다. 어느 해 가을 우리 어머니는 혼자서는 도저히 머리에 일 수도 없는 무게의 모싯잎을 이고 내려가다가 중간에 너무나 고개가 아파서 쉬어야 했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 짐을 내리고 쉬어버리면 누가 다시 이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10리를 걸어 조양까지 갔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힘겨운 삶이었을 겁니다. 추석 무렵이면 그 눈물겨운 일이 생각납니다.

겨울이면 띠를 베어 발을 만들어 팔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발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발장은 김을 말리는 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발장 만드는 일은 양반이었고 겨울철에 하는 일 중 최악은 억새와 신우대를 베어다 파는 일입니다. 엄밀하게는 키 큰 신우대가 아닌 조금 더 키가 작은 조릿대였는데 그때는 그냥 신우대라고 불렀습니다.

이 억새와 신우대는 인삼을 키우는 사람들이 사다가 발로 엮어서 인삼밭을 덮는 차광망으로 썼다고 하는데 억새로 만든 것은 1년이 가고 신우대로 만든 것은 3년이 간다고 했습니다. 겨울방학이면 도시락 하나 싸 들고 어머니를 따라서 억새 숲과 신우대 숲으로 가게 됩니다. 중간에 찬밥을 먹고 날이 저물도록 베어서 묶고 나릅니다. 재수 없는 날은 억새 숲, 신우대 숲이 응달이라서 눈이 전혀 녹지 않는 곳이 걸리는 수가 있는데 그런 곳에서 몇 시간 이상 서서 일하다 보면 발이 동상에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어느 때 춥고 발도 시리고 배는 고프고 어두워지기까지 해서 집에 가자고 어머니를 졸라도 어머니는 그 인근에 있는 걸 다 베어 놓고 가고 싶은 욕심에 대꾸도 없이 묵묵히 일하실 때 화도 나고 서럽기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고생은 다시 하기 싫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도 등산하다가 먼발치에 신우대 숲이라도 보일 양이면 그때 생각이 문득 납니다. 슬그머니 신우대 밭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나물 뜯어 파는 일, 모싯잎 따다 파는 일, 억새와 신우대 베어다 파는 일을 특히 억척스럽게 많이 하셨던 세 분이 또 이렇게 마지막까지 한치에 남아 계십니다. 세 분 모두 고생하던 시절 이야기들 옛 추억으로 삼아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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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오우 ~
    대단합니다
    그시절 꿋꿋하게 살아오신 부모님들께 경의를 보냅니다

  2. 기억은 사유의 힘이고 삶을 부요하게 일구는 땅과 같음을 느낍니다.
    참으로 고단했고 힘겨웠던 시절을 푸른 시누대처럼 살아내신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3. 어머니 따라 신우대 베러가서 일하다 먹었던 점심밥 생각이 납니다.
    점심밥은 김밥인데, 말 그대로 김하고 밥으로만 만든 김밥입니다.
    김 한장을 펴고 밥을 펴서 바른다음 가운데에 묵은 배추김치 한줄기를 넣고 그대로 말아낸 기다란 김밥.
    신우대 작업하다 점심으로 식어버린 차디찬 김밥 한 개를 먹고나면, 체온회복을 위하여 온몸이 자동으로 5분이상 심하게 떨렸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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