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너메에는 ‘진뱅이’라고 불렸던 동냥치가 두 명 있었습니다. ‘진뱅이’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었다고 하니 다리를 저는 사람, 즉 ‘절름발이’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동란 이후 다들 어려웠겠지만 전답이 없고 육체노동으로도 생계를 이을 수 없는 사람은 걸인이 되어 연명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두 명의 진뱅이 중 한 명은 기억에 없는데 일찍 죽었거나 다른 호구책을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한 명의 진뱅이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한치를 통해 나다니며 동냥을 했습니다. 내 기억에 없는 진뱅이가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한치에는 여순 사건 이전에 큰 한치에 50여 가구, 작은 한치에 30여 가구가 살다가 여순사건과 6·25동란을 맞아 모두 소개(疏開) 당해 피난을 나갔는데 동란 이후에도 큰 한치에는 30여 가구 이상이 다시 들어와서 살았다고 합니다.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출산율이 대폭 증가되는 추세 속에서 한치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1965년 큰 한치에는 열 명이 넘는 신생아가 출생했다고 하니 그해에는 세 집에 한 집꼴로 아이가 태어난 셈입니다.
예전의 동냥치들은 금줄이 처진 집은 동냥을 하지 않는 풍습을 잘 지켰다고 합니다. 보통 진뱅이는 다른 마을에서 동냥을 한 뒤 한치에서 마지막으로 동냥을 하고 나서 비잣재를 넘어 재너메로 돌아가야 하는데 한치에 금줄이 처진 집이 많아 영 영업이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금줄이 쳐진 집은 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집들도 대개 낮에는 어른들이 들로 나가 있으므로 마땅히 동냥할 만한 집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진뱅이가 한치에서 제대로 동냥을 못 하고 비잣재를 넘으려니 잔뜩 부아가 나서 비잣재에서 한치 동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엠병할 놈의 동네가 밤낮으로 애기들만 퍼질러 싸 놓아서 남 동냥도 못하게 하네”라고…. 윗뜸에 사는 몇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일담은 모릅니다. 아마 그 진뱅이는 후에도 여전히 아무 일 없었던 듯 한치를 통해 나다니고, 또 동냥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못사는 사람들이 적은 정성이라도 더 후한 법이니까요.
다른 한 명의 진뱅이, 이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늘 함께하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정말 유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굣길에 아이들이 이 진뱅이를 만나면 놀려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저 헤헤 웃으면서 오히려 동냥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몹시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그 음식을 받아먹지는 못했습니다.
이 진뱅이가 우리 집에 들르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항상 보리쌀 됫박이라도 퍼주었지 그냥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 진뱅이가 문상 겸 동냥을 와서 ‘아짐, 아짐’하고 허리를 숙여가며 서럽게 울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종내에는 막걸리에 취해 노래 부르고 춤도 췄던 기억이 납니다.
4~5학년 무렵 이 진뱅이의 부인이 혼자서 동냥을 나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분 또한 육체적으로는 불편했는데 남편과는 달리 매우 사나웠습니다. 그때 또래들과 함께 그 진뱅이 부인을 놀려먹었는데 이 부인이 무섭게 욕을 하며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쫓아오는 바람에 집으로 숨어 들어와 벌벌 떨던 기억이 납니다.
재너메로 가는 비잣재가 끊긴 이후 어느 해, 어머니에게서 이 진뱅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진뱅이가 중풍을 앓고 누웠는데 딸이 효녀여서 아버지 수발을 하느라고 혼기도 놓쳤다고 하였습니다. 이 딸 외에 아들도 있는데 부모들과 달리 자식들은 모두 건강하고 똑똑하며 인물들도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 진뱅이는 돌아가시고, 그 딸도 좋은 곳으로 배필을 정해 혼인을 했을 것 같습니다.
90년대 이후 한 10여 년가량 한 비구니 스님이 우리 옆집을 사서 암자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재너메의 아짐들 몇 분이 초파일 전날이면 비잣재를 통해 미리 한치에 와서 우리집에서 일박을 하셨던 적도 있으니, 재너메와 한치 사이의 비잣재 길은 그때까지 간간이 이어진 셈입니다.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소재지에서 장흥군 유치면을 향해 오려면 덤재를 넘어야 하는데 덤재로 오르기 바로 직전에 ‘남송리 입석마을’이 있습니다. 덤재 초입의 입석 저수지 바로 아랫마을입니다. 여기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한계령 고개에 비견해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고갯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바로 재너메 마을을 금정면 소재지 쪽으로 연결하여 비잣재가 끊기게 한 길입니다.
그 고갯길을 다 넘어서 한참을 더 가면 어느덧 포장도로도 비포장으로 바뀌고 유치면 가지산에 있는 절 보림사까지 쭉 연결됩니다. 아주 가끔 이 길로 차를 몰아보기도 하는데 중간에 우측으로 들어가면 재너메 마을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재너메 마을까지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그곳 역시 몇 집 남지 않은 채 쇠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그림이 그려지네요
동냥아치가 무서워 숨었던 기억도 나고…다음 스토리가 기대됩니다^^
겨울 밤에 듣는 가슴시린 옛 이야기.
배고픈 이들이 너무 많았던.
보름달 같던 소원을 품고 견디고 또 견디며 살아냈던.
아궁이 불을 지피면서 매캐한 연기에 눈물났던.
사랑이 가장 사랑다웠던.
어렸을때 재너머 진뱅이 왔다고 하면, 그냥 무서워서 숨었던 기억이 나네요.
왜 그랬었는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