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1월 2, 2024
연재한치이야기 19 – 자장면이 싫어지다니

한치이야기 19 – 자장면이 싫어지다니

얼마 전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중화요리집에 예약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소싯적에는 ‘중국집’, ‘중화요리집’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입에 침부터 고였는데 지금은 ‘에이… 하필 중국집?’ 속으로 이 생각부터 했습니다.

불붙듯이 뜨거운 애정이 생겼다가 차츰 식기도 하는 것이 보통은 남녀관계에서나 벌어지는 일 같지만 잘 돌아보면 취미나 음식에서도 그런 일은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아주 좋아했었는데 점점 안 찾게 된 대표적인 음식이 튀김, 자장면, 돈가스 이런 종류들입니다. 아이스크림의 경우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젠 치아의 고통을 동반하는지라 예전보다는 덜 먹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음식들에 관한 단상입니다.

생각만 해도 군침 도는 ‘튀김’

유치중학교를 막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교문 앞에서 어떤 아짐 한 분이 튀김 좌판을 벌여놓고 며칠 동안 현장에서 직접 고구마튀김을 만들어 판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끝나면 부지런히 10리 길을 재촉해서 귀가한 후 깔(꼴) 베서 소죽 쓰고, 염소 들여 매는 따위의 집안일을 도와야 했는데 중학교 입학하면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학교 바로 옆 배바위 마을에서 자취하게 되었고, 도와야 할 집안일도 없으니 이제 하교하면 남는 게 시간이었습니다.

학교만 끝나면 교문으로 달려가서 옆에 딱 붙어 그걸 구경했습니다. 구경도 구경이지만 먹고 싶은 마음을 주체 못 해 냄새라도 맡으며 대리만족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마채가 하얀 밀가루 반죽에 섞여 펄펄 끓는 기름 속으로 풍덩 빠지면 ‘치이익’,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노란 튀김으로 거듭나는 장면….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돕니다. 물론 돈이 없어서 한 번도 사 먹지 못했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순경이 와서 튀김 아짐을 단속했고 이후 교문 앞에서 튀김 아짐을 보지 못했습니다. 좋아하던 구경거리 하나가 아쉽게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중1 때 교문 앞에서 튀김 구경만 하고 사 먹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이후 용돈만 생기면 튀김을 사 먹었습니다. 광주에서는 한때 야채튀김이 대유행을 한 적이 있고, 또 학생회관 골목이라는 곳에서는 ‘상추튀김’이 유행했습니다.

상추튀김은 상추를 튀긴 것이 아니라 각종 튀김을 상추에 싸 먹는 방식을 말하는데, 광주에서는 상추튀김이 튀김 먹는 방법의 정석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츰 이 튀김에 관한 애정이 차갑게 식고 말아서 지금은 일부러 사 먹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황홀했던 첫 느낌 ‘자장면’

자장면을 처음 먹어 본 때는 중1 때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장면과 우동을 시켜 아버지는 우동을 드시고 내겐 자장면을 주셨습니다.

황홀했던 자장면의 첫맛. ‘정녕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음식이었다는 말인가!’ 자장면 그릇이 하얘질 정도로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식당 안에 보는 눈만 없었다면 혀로 싹싹 핥아먹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최고의 음식은 단연 ‘자장면’이었습니다. 처음 자장면 먹었던 1979년 자장면과 우동값은 250원이었습니다. 해가 가면서 조금씩 올랐지만 고교 졸업 때까지 500원을 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큰누나 친구 중 ‘민이 누나’란 분이 있었습니다. 민이 누나네는 영광 무슨 면에서 주조장(酒造場)을 하던 부잣집이라고 했는데, 큰누나와 절친이기도 했거니와 우리 형제들을 자기 친동생처럼 이뻐했습니다. 큰누나 고등학교 시절 민이 누나가 그 불편한 한치 집까지 놀러 왔을 정도였는데 둘이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는 있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고2 무렵이었습니다. 쉬는 날 누나들은 다 외출하고 동생도 유치 집에 갔던가 해서 혼자 자취방에 남아 무료하게 뒹굴고 있는데 민이 누나가 놀러 왔습니다. 내가 혼자 멍하게 있는 것이 짠했던지 뭐라도 사 먹으라며 천 원을 주고 갔습니다. 보통은 그런 일이 있으면 큰누나에게 보고 후 허락받고 돈을 쓰는데 혼자 있을 때 갑자기 돈이 생기니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큰누나 귀가 때까지 기다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불문곡직 중국집으로 냅다 뛰어가서 일단 자장면부터 한 그릇 시켜 먹었습니다. 자장면 한 그릇을 잘 먹었는데도 도무지 배가 찬 느낌이 들지 않고 여전히 속이 허했습니다. 손에 돈은 있겠다 눈 질끈 감고 우동 한 그릇을 다시 시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그제야 뭘 좀 먹은 것 같았습니다.

진짜 먹성 좋았던 크는 나이에 잘 못 먹고 살던 시절이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자장면과 우동을 먹고도 200원 이쪽저쪽 분명히 남았을 터인데 이미 엎질러진 물, 내친김에 남은 돈으로 아이스크림인지 과자인지까지 사 먹어, 그렇게 천 원을 홀랑 다 써버렸습니다. 큰누나한테 보고 없이 선지출을 한 죄로 민이 누나한테 용돈 받았다는 말도 못 꺼내고 며칠 눈치를 보며 조마조마 지냈습니다.

그냥 잘 넘어가나 싶었는데 며칠 후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네 이놈의 새끼, 민이가 천 원 줬다며? 그 큰돈을 말도 없이 몰래 써버려?” 이런 취지로 야무지게 혼나고 말았습니다. 민이 누나가 주었던 용돈 건은 ‘불안했지만 행복했던 성찬’을 거쳐 결국 혼나는 ‘새드엔딩’으로 끝났는데, 그때 잘 먹었던 자장면과 우동은 한창 클 시기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의 키에도 얼마간의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젠 상황상 어쩔 수 없을 때 말고는 여간해선 자장면도 잘 안 먹고, 어쩌다 옛날 기분으로 먹고 나도 “괜히 먹었다”며 후회할 때조차 있습니다. 입맛이 변해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심하게 변해 버린 것입니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한치마을 가을 단풍나무 | 마동욱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한치마을 가을 단풍나무 | 마동욱

맛의 새로운 경지 ‘돈가스’

고1 2학기 때였습니다. 어떤 달 시험성적이 좀 올랐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큰누나가 주말쯤 시내로 데리고 가더니 처음 보는 이상한 음식을 시켜주었습니다. 탁자에 포크, 나이프, 스푼이 있었고 수프가 나오더니 케첩이 뿌려진 커다란 납작 튀김 두 덩이, 밥과 샐러드 조금이 넓은 접시에 한꺼번에 담겨 나왔고 김치도 조금 나왔습니다. 그렇게 돈가스를 처음 접했습니다.

‘와, 맛의 새로운 경지 끝판왕’ 돈가스의 첫맛도 너무나도 강렬했습니다. 그 뒤로도 새로운 음식들을 접했을 텐데 어렸을 때의 ‘마른오징어’, 중학교 때의 ‘자장면’, 고등학교 때의 ‘돈가스’ 이 음식들을 처음 먹었을 때 그 놀라웠던 느낌들에 필적할 만한 음식은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최고의 음식은 자장면에서 돈가스로 즉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돈가스는 너무 비쌌습니다. 정확지는 않지만 자장면값의 두 배쯤 혹은 그 이상 되지 않았을까? 스스로 사 먹을 수 없는 종류였고, 큰누나의 처분만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긴 더 쌌다고 해도 수중에 돈이 없었으니 쉽게 못 사 먹는 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큰누나의 기준은 엄격해서 성적이 좀 올랐을 때만 겨우 한 번씩 사주었습니다. 그러나 성적이라는 것이 마음먹는다고 늘 오르는 것도 아니고 오르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니 돈가스 먹을 일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반대로 성적이 답보 상태거나 떨어지면 욕을 먹고 혼나기 마련이었으니 돈가스 먹었던 달보다 ‘욕을 먹었던 달’이 더 많았을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광주에는 한 돈가스 전문점이 굉장히 오랫동안 시내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영업을 했는데 10여 년 전 자리를 옮겨 뷔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뷔페식으로 바뀐 후 옛날 기분으로 몇 차례 찾은 적도 있지만 차츰 발걸음이 뜸해졌습니다. 그렇게나 맛있었던 돈가스도 이젠 일부로 찾아서 먹는 음식은 아니니 세월 탓인가, 나의 변덕 탓인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버스비 모아 사 먹던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을 향한 애정은 아직 식지 않아서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 늙어가는 몸이여!” 아이스크림을 먹기는 먹지만 이놈의 치아가 시린 통에 먹는 즐거움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 날이면 아이스께끼 장수가 왔으니 몇 학년 때인지는 몰라도 운동회 날 ‘하드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 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와 유치중 시절까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어 보지는 못했고 소프트아이스크림은 광주 전학 이후 처음으로 먹어 보았습니다.

광주 충장중 전학 후 학동에 자취방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산수동 학교까지 시내버스로 다녔습니다. 몇 주 지나 친구들과도 친해지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고 나서 보니 자취방 인근 사는 애들이 대부분 걸어 다니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시내버스 요금을 몰래 용돈으로 사용하고들 있었습니다. 포털 ‘길 찾기’를 해보니 자취하던 곳에서 충장중까지 도보 거리는 약 3.4km 정도로 나옵니다. 초등학교 때 걸어 다녔던 한치마을에서 유치 초·중학교까지 거리가 약 4.4km였으므로, 그보다는 1km나 짧은 거리였습니다.

“걸으면서 버스요금 아껴 용돈으로 쓴다”는 어마어마한 고급 정보를 들었으니 하루도 망설일 이유가 없어 즉시 걸으면서 버스요금을 모으는 그 조직에 합류했습니다. 부모님이나 누나로부터 버스요금을 받은 후 걸어 다니면서 그걸 아껴 꿀꺽하는 것이 ‘건전한 소비생활’이었는지 ‘삥땅’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경계가 모호한데 그때는 ‘삥땅’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큰누나에게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었으니까요. 아마도 큰누나는 내가 그 시절 그렇게 걸으면서 몰래 버스요금을 모아서 쓴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비가 오거나 많이 늦은 날을 제외하면 착실하게 걸어 다니며 버스요금을 모았습니다. 그때 학생 승차권(회수권)값은 20원 이쪽저쪽쯤 되었으려나 싶은 미미한 액수였을 테지만 그래도 며칠 착실하게 걸으면 과자나 아이스크림, 튀김 등 소소하게 군것질할 정도 돈은 되었습니다. 그렇게 ‘걸으면서 모은 돈’으로 드디어 소프트아이스크림인 ‘부라보콘’을 처음 사 먹은 날의 일입니다. 너무 비싸서 사 먹지 못했던 부라보콘을 사서 기대되는 마음으로 종이 껍질을 벗겼더니 속에 무슨 껍질이 한 겹 더 있었습니다.

‘와, 비싼 건 껍질도 두 겹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부라보콘은 그때 100원이었습니다. 자장면이 250원 하던 때이고 하드 ‘아맛나’가 50원이었고 자취방 주변 가게에 10원짜리 하드도 있었으니 부라보콘은 상당히 비싼, 당시 최고급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과자 피를 속껍질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말았으니 당연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벗겨내어 버리면서 내용물만 먹었습니다. 몇 입 먹던 도중 실수로 속껍질을 조금 씹고 말았는데 속껍질에서 고소한 과자 맛이 나는 겁니다. 아무래도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만히 주변에 부라보콘 먹는 다른 학생들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때마침 여러 명이 가게 들어가서 그중 누가 부라보콘을 들고나오는데 종이 껍질만 벗겨내고는 속껍질까지 우걱우걱 베어먹는 겁니다. ‘아뿔싸! 지금까지 먹는 것을 버렸구나’ 이렇게 부라보콘 처음 먹으면서 평생 잊지 못할 바보 같은 추억거리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경험으로 ‘잘 모르는 일은 성급하게 판단해서 대뜸 저지르고 볼 것이 아니라, 물어보거나 찾아보거나 관찰한 후에 비로소 시행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훈에도 불구하고 조급한 성질머리로 인해 늘 바삐 굴다가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맙니다. 잘못된 버릇을 아는 것도 힘들지만 고치는 것은 더 힘든 게 또 인생살이의 어려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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