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7월 24, 2024
연재한치이야기 17 – 쉬어가는 생

한치이야기 17 – 쉬어가는 생

1990년대 중반 무렵 정신과 의사 김영우 박사가 <전생여행>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정신과 병원 운영 중 여러 치료법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병이 잘 낫지 않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최면요법을 시도해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환자들이 전생(前生)의 기억을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환자가 최면 상태에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 후 전생에서의 문젯거리가 현생까지 연결되어 병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해당 고질병이 해결되더라’는 식입니다.

현재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검색이 가능한 이 책 소개글 앞머리에는 ‘최면요법’에 대하여 ‘환자를 최면상태로 이끌어가 현재 증상의 원인이 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함으로써 각종 난치성 육체적·정신적 질환을 근원적으로 치료하는 획기적인 치료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뭇 생명체들이 과거 수없이 많은 생을 거쳐 현생에 이르렀고 또 후생으로 끊임없이 돈다는 전생론(轉生論)은 여러 문화권과 다양한 종교에서 거론되는 주제 같습니다.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꽤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나는 과거 어떤 나쁜 단체들의 경험 끝에 모든 종교적 관념은 철저히 배격하기로 단단히 결심하며 살고 있으므로 종교적 관점과는 전혀 무관한 입장이지만, 어쨌든 전생론이 진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들과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고도 큰 보상 없이 어렵게 살다 간 사람들에게 후생에서나마 더 좋은 생이 펼쳐지고 반대로 남들에게 혹은 이 세상에 큰 해악을 입히고도 벌받지 않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과보(果報)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생론을 믿기로 하면 누가 보든 말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양심에 따라 지겠다는 마음이 더 굳건해질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전생은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전생에 대한 기억이란 다른 영적 존재가 하는 속삭임을 자신의 기억으로 착각하는 것이라는 설, 즉 최면요법이나 억지로 전생을 기억하려는 노력 따위는 모두 “영적 감염의 위험이 있으니 자제해야 한다”는 이론도 있는데 유의해서 나쁠 것은 없을 듯합니다.

각설하고 김영우 박사의 전생여행에서 여러 사람들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여러 전생을 기억해 냈는데 좋았던 생들, 힘들고 처참했던 생들의 도중 지극히 평범한 시골의 아낙으로 태어나 큰 고생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이, 그렇다고 크게 부귀영화를 누림도 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다 간 인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의사에게 그 생을 ‘쉬어가는 생’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수없이 많은 여러 생을 거쳐 가며 지고(至高)의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인데, 너무 힘들고 처참한 삶이 계속되면 지치기 마련이니 아예 한 생은 통째로 쉬어가는 생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곧바로 A할머니를 떠올렸습니다.

A할머니는 한치로 시집오신 후 쭉 한치에서 사시다가 십수 년 전 돌아가신 분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A할머니는 평생을 조용하게 일만 하셨습니다. 심한 눈보라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아니면 해 있는 동안에는 오로지 들이나 산에 계셨습니다. 다만 일도 죽자사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의 날갯짓처럼 마른 잎 하나가 냇물 위를 떠서 고요히 흘러가듯 쉬엄쉬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애초에 남과 어울리는 법이 없었으니 평생 남의 일을 입에 올렸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 생을 통틀어 구업(口業)도 악업(惡業)도 짓지 않고 순백의 영혼으로 살다 가셨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커서 10대 후반기 무렵부터는 A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드리면 손자뻘인 내게 반말을 하시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시는 말씀은 “와겠소(오셨소)? 들어가 밥 좀 자셔게” 딱 이 두 마디뿐이었습니다. 쉬어가는 생이 정말 존재한다면 A할머니야말로 그런 생을 살다 가신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힘든 일이 닥쳐 쉬이 가시지 않을 때면 쉬어가는 생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내 삶은 왜 이다지 평온하지도, 평탄치도 못하는가’ 하는 한탄을 자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 다시 돌아보면 자신의 삶을 ‘시련의 생’으로 만드는 것도, ‘쉬어가는 생’으로 만드는 것도 모두 스스로의 탓이었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철이 들어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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