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루메’가 ‘말린 오징어’의 일본말이라는 사실은 한참 더 커서야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 처음 맛본 여러 가지 음식 중에서 과자류나 빵, 엿 등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없었지만 첫맛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단연 스루메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져오신 시양(시제) 꾸러미 속에 있던 스루메를 처음으로 먹어보았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시제에 직접 따라갔다가 한 조각 얻어먹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 오묘하고도 환상적이었던 스루메의 첫맛에 대한 기억은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과자류나 엿 따위는 그 맛이 매우 화려하고 자극적이지만 다소 일시적이라고 한다면 스루메는 첫맛은 다소 퀴퀴하고 이질적이어서 거부감마저 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깊으면서도 독특한 맛이 나고 다 삼키고 나서도 오래도록 입속에 여운을 남기는 그야말로 오묘한 음식이었습니다.
이 희한한 스루메의 맛에 단박에 빠져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진귀한 음식은 오로지 시제 때나 되어야 일 년에 두어 차례 맛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치 마을에서 시제는 우리 문중(門中)의 시제 두어 건과 남의 집안 시제 몇 건이 봄, 가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치 마을에는 수백 년 전 장흥 마씨가 먼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뒤이어 남평 문씨가 입촌했는데 처음에는 장흥 마씨로부터 텃세를 받아 힘든 시절도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간에 통혼도 하면서 자연스레 양대 성씨로 자리 잡았던 모양입니다. 그 밖에 정씨, 배씨, 박씨, 김씨 등 타성바지들도 몇 집 살았는데 마씨, 문씨 외 타성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일부는 사위들이 처가살이하러 들어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시제만큼은 어린아이들의 참여를 적극 장려하였던 것이 정말로 좋았던 문화였습니다. 운 좋게 휴일에 어떤 시제가 있기만 하면 열 일 제쳐두고 참석하였습니다. 시제가 끝나고 나면 큰 함지박에 밥, 나물류와 김치 따위의 반찬을 모두 섞어 비빔밥을 만들어 참석자 전원이 그걸 나누어 먹는데, 그 맛은 항상 천하일품이었습니다. 하긴 그 시절에 무엇인들 맛있지 않은 게 있었을까 싶긴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른들은 시양 꾸러미 하나씩을 나누어 가지게 되고 아이들에게는 떡 한 조각과 고대하던 스루메 한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스루메는 한입에 쏙 집어넣고 단숨에 씹어먹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음식인지라, 거짓말 좀 보탠다면 눈곱만큼 조금씩 떼어먹거나 숫제 쪽쪽 빨아먹을 정도로 아끼고 또 아끼면서 먹었습니다.
이 기억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마른오징어 먹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입이 좀 고급스러워졌는지 마른오징어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알 정도가 되었고, 또 부위별 맛에도 차등을 두어 일단 몸통부터 먹고 머리와 다리 쪽은 남겨놓는 경우가 많아서 아내로부터 한 소리 듣기도 하는 것이 어릴 때와 큰 차이점이기는 합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마른오징어를 씹을 때 치아와 턱에 가해지는 힘이 몇 톤에 이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굉장히 무리가 가는 일이라고 하니 치아가 더 상하기 전에 ‘이 마른오징어 먹는 습관도 조금 절제해 나가야지’ 하는 다짐도 합니다만, 이 다짐은 또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스루메의 맛 표현이 참 맛갈납니다.
귀하게 아껴먹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때 스루메를 참 좋아했습니다. 제주도 여행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귤과 스루메를 사 오셨는데 형제들이 많아 통째로 먹어보진 못했어요. 겨우 다리 한 두 개 였지만 아주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처지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 스루메는 진짜 맛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