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치까지 군내버스가 들어옵니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한치에 군내버스가 들어온다는 것은 신기하고 믿기지 않는 장면입니다.
몇 년 전 한치에 학생이 한 명 있을 때는 통학버스도 들어왔습니다. 한치의 토박이 학생은 오래전에 대가 끊겼습니다. 그러다가 한치에 새로 이주해 들어온 어떤 집에 1999년생의 아이가 한 명 있어서 다시 한치에도 학생이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유치 초·중학교에 다닌 9년 동안 통학버스로 등하교를 하였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입니다.
어렸을 때 아침에는 뛰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학교까지 십 리가 조금 넘는 길을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뜀박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막 아침밥을 먹고 난 이후에 뛰면 배가 쑤시고 당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뛰어도 늘 지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늦게 주셨던 탓도 있으나 대개는 전날 숙제를 하지 않고 놀다가 아침에 뒤늦게 숙제하느라고 늦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인제야 마루에서 궁둥이 치켜들고 숙제나 하고 있느냐고 싫은 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그렇게 지각을 해도 선생님들로부터 그다지 많이 혼난 기억은 없습니다. 마을이 멀다고 다들 인정해 주신 탓입니다.
아침 등굣길과는 판이한 것이 하굣길이었습니다. 특히 남자애들은 빨리 집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집에 일찍 가보아야 깔(꼴) 베고 농사일이나 거들게 되는 수가 많으므로 일찍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봄철에는 새순을 끊어 먹습니다. 찔레 순, 칡 순, 싸리 순, 또 시큼한 맛이 나는 무슨 풀 순 등등…. 늦은 봄부터 여름철에는 여러 종류의 산딸기가 지천으로 있었습니다. 또 여름철에는 멱 감고 고기 잡느라 늦고, 가을철에도 멜구(머루), 꾸지뽕 열매, 포리똥(보리수나무 열매), 홍시, 야생 돌배 등 열매를 따 먹느라 늦습니다.
그 십리 길과 계곡, 산속에 무궁무진한 놀잇거리와 먹거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는 어떤 녀석이 산속을 헤매다가 해골을 발견하고 알려주어 두려움을 안고서 그걸 구경한 일도 있는데, 아마 반란군이나 빨치산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이한 먹거리로는 억새와 목화가 있었습니다. 가을이면 멋들어지게 피어나는 억새도 막 여물 무렵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속살로 차 있어 훌륭한 먹거리입니다. 대형 ‘삐비(삘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시간이 지나 패면서 우리가 보는 멋진 억새가 되는 겁니다. 목화의 속도 패기 전에는 마찬가지로 먹을 수 있는데 목화 속은 새콤한 맛이 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만 목화는 남의 밭작물이므로 한두 개 따서 맛을 보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늦장을 부리다 보면 저녁이 이슥해져서야 집에 도착하는 날도 있게 됩니다. 귀가가 늦었다고 하여 깔 베서 소죽 쑤는 일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므로 저녁 어스름 녘에 깔을 베느라 급한 낫질 끝에 손가락을 베이기도 많이 베었습니다. 언젠가 고등학교 무렵 왼 손가락에 남은 상처를 세어보았더니 열 몇 개가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더 지나서 그 상처의 흔적들도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한치까지도 학생 한 명을 위하여 통학버스가 학생을 모셔다드리는 그런 시절까지 지나왔습니다. 좋은 시절 같지만 한편으로 쓸쓸하고 허전한 생각도 듭니다. 그 하굣길에 왁자하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 어디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을까요?
유년의 기억을 기억할 수 있는 이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때는 고생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큰 팔 벌려 안아주고 품어주던 자연이 있었지요.
문 작가님의 글을 읽노라면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곤 합니다. 박완서 작가의 책 ‘그 많던 싱아는 어디 갔을까’ 처럼, 우리 유년의 싱아같은 벗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 시대
그 시절이 떠오르게 하는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