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월 14, 2024
연재한치이야기 1 - 재너메 길은 끊겼어도

한치이야기 1 – 재너메 길은 끊겼어도

한치(寒峙),
찬 바람이 부는 고개라는 뜻일까요?
나는 어렸을 때 이 이름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촌스러운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고, 실제로 동무들이나 아랫마을 어른들이 마을 이름을 가지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한치는 해가 한치밖에 뜨지 않느냐는 둥, 해가 일찍 지고 전기가 없으니 자식들이 많다는 둥….

그래서 어린 마음에 동무들에게도 한치라고 부르지 말고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인 ‘인암(印岩)’이라고 불러 줄 것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하면서 한치라는 말이 정겹게 느껴져서 그 뒤로는 줄곧 한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암이라는 이름은 마을 어디께에 도장을 닮은 바위가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불가나 도가 쪽에서는 도장 인자(印)를 깨달음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한치(인암)마을 입구 표지석 | 임성동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한치(인암)마을 입구 표지석 | 임성동

지금은 한치가 막다른 곳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한치가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의 맨 윗집 뒤쪽으로 고갯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고갯길을 ‘비잣재’라고 불렀습니다. 그 비잣재를 넘어가면 ‘재너메’ 마을이 있었습니다. ‘재너메’는 ‘재너머’ 혹은 ‘재넘어’를 어른들이 전라남도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청룡리에 속한 재너메 마을은 ‘기암 마을’을 부르던 한치 사람들만의 별칭입니다. 재를 넘어가야 나오는 마을이므로 재너메 마을이라고 부르게 된 듯합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재너메 마을은 금정면 소재지로 통하는 길이 잘 닦여서 자연스레 한치와 왕래가 끊겼습니다. 그전에는 재너메 마을 사람들이 비잣재를 넘어 한치를 통해 외부로 다니는 것이 훨씬 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너메 사람들은 장을 보고 가는 길에 한치에서 막걸리도 사 마시고 젊은 청년들은 가끔 또래의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재너메에 사는 동냥치들도 한치를 통하여 동냥을 다녔습니다. 조양마을에서 서북쪽 골짝 길로 3km쯤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1km쯤 가면 큰 한치이고, 오른쪽 길로 1km쯤 가면 작은 한치입니다. 이 글의 ‘한치’는 ‘큰 한치’를 말합니다.

비잣재 길이 끊길 무렵을 전후하여 큰 한치에는 토박이가 4가구만 남게 되었습니다. 여순 사건 이전에 큰 한치에 약 50호, 작은 한치에 약 30호가 살았다고 하니 결코 작은 마을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까지도 큰 한치는 얼추 20여 가구는 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트럭이 한 번 들어왔다 하면 한 집이 이사 가고, 또 때로는 트럭이 오지 않았는데도 한 집이 이사를 가고 없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광주로 유학 가서 주말이나 방학 때만 집에 왔는데, 1주일 사이 혹은 2주일 사이에 집에 와 보면 또 한 집이 이사 가고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지금 큰 한치에 토박이는 3집만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을이 비어갈 무렵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한치는 완전히 폐촌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에 퍽 쓸쓸했었습니다. 그 무렵 아래와 같이 끝나는 졸시(拙詩)를 끄적이기도 했습니다.

빈 마을

인적 끊어지면 한치
죽은 자가 차지할 마을

무너진 토방 위로 바람 몰려와
혼백을 데리고 놀다 하늘로 갈
텅 빈 마을

그런데 90년대 들어서면서 마을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마을에 새로 들어와 살고 있는 가구가 늘기 시작하더니 현재는 새로운 가구가 7곳까지 늘었습니다. 중간에는 암자까지 들어섰던 적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한치에 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순전히 등고선 지도만을 보고 한치가 (풍수지리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무작정 들어왔다는 분도 있습니다.

폐촌이 될 줄만 알았던 쓸쓸한 마을에 어느덧 다시 훈기가 느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비록 비잣재를 통해 재너메로 가는 길은 끊겼지만 한치 마을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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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투박한듯 정감이 느껴지는 글이 정겹네요. 좋은 글 기대합니다.

  2. 문 작가님 고향 한치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서두를 것도, 멈출 것도 없이 옛 이야기 같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푸근한 하늘과 숲을 만납니다. 언젠가 치유의 숲으로 우리들을 맞아줄 한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3. 재너머 마을에서 읍에 있는 우시장에 한치를 통하여 소팔러 나가려고, 새벽에 넘어왔다가 꼬박 하루를 보내고 해진 뒤에 다시 돌아가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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